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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 이름

성씨에 대한 이야기

by 소포로스 2022. 1. 4.

 

성씨에 대한 이야기


1.
누군가를 지칭할 때, '[부산]에서 온 아무개'라고 하든가, '[광주]에서 사는 아무개' 또는 '[쌀집] 둘째 아들 아무개', '[너럭바위] 근처에 사는 아무개' 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 부산, 광주, 쌀집, 너럭바위 등등이 고대에는 성씨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라틴어권 이름에서 쌀집, 너럭바위 등등은 성이 되었고, 그리스어권(로마시대에도)에서 광주 부산 등과 같은 출신지는 '나사렛 예수'와 같이 어떤 사람을 지칭할 때 성 대신 사용되었다. 당시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성이 없었는데, 같은 이름이 많다보니, 부산출신 철수인지 광주출신 철수인지 구별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근대 이전의 고대 그리스어로 저작을 남긴 사람들이나 그리스어 문화권 출신 유명인들을 말할 때, 이름 + 출신지 형식은 일종의 표준으로 굳어졌다. 위키백과에서는 고대 그리스인들을 대부분이 이와 같은 형식으로 이름을 표시한다.

 



2.

일단 동양의 성씨부터 살펴보았다. 오래 전에 읽어 기억이 흐릿하지만 자치통감에서 누군가에게 어떤 지역을 다스리게 하고 그 지역 이름을 성으로 봉했던 기억이 있다. 

고대 중국의 제왕들은 자신들을 구별하기 위한 성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하 및 여러 부족을 관리하고 세금을 부과할 목적으로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이나 주변의 산 강 나무 등의 자연물로 성을 지어 하사하였다고 한다. 

고대 전설 속의 인물들도 성을 가지고 있다. 신농은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살았으므로 '강'이라는 성을 가졌고. 황제는 어머니가 희수에 살아서 '희'라는 성을 가졌다(<春秋>隱公8의 주해). 희씨성은 주나라 왕실의 성이다.

* 여기서 말하는 황제(黃帝)는 전설 속의 황제로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의 공통 시조이다. 우리가 아는 중국의 황제(皇帝)는 진시황이 시초이다. 왕은 천하에 1명이어야 하는데, 전국시대 제후들이 너도나도 '왕'이라고 스스로를 칭하였으므로,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명칭을 업그레이드하여 천자의 칭호를  '왕' 대신 황제라 하고, 기존의 '제후'급을 왕이라고 불렀다. 

중국인의 시조로 여겨지는 황제(위키)



처음에는 성과 씨를 구분하였는데, 성은 어머니의 출신지를 말하고, 씨는 아버지와 같이 살던 곳을 가리킨다고 한다. 예를 들면 황제(黃帝)는 성은 희이고 씨는 헌원이다. 

이와는 약간 다른 설명이 한국문화대백과사전에 나온다. "남자는 씨를 호칭하고 여자는 성을 호칭"(무슨 뜻인지 정확히 모르겠다)하다가 한나라 때부터 성과 씨의 구분이 없어졌다고 한다. 또한 성(姓)은 모계시대에는 여계의 혈통을 나타내었고, 부계시대에는 남계의 혈통을 나타내는 표지였다고도 한다. 

중국에서 족보가 만들어진 것은, 고조선 시대에 해당하는 한나라 때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사회에서 성씨를 가진 사람은 극히 일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3.

한국은 삼국시대 전후부터 성을 썼다고 한다. 고구려는 장수왕 시대부터 중국에 보내는 국서에 고씨 성을 사용하였다. 백제는 근초고왕 때부터 여(餘)씨 성을, 무왕 때부터는 부여씨 성을 사용하였고, 신라는 진흥왕 때부터 김씨성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신라 3대 유리왕 때는 육부 촌장들에게 이 정 손 최 배 설 등의 성을 하사하였다.

우리 나라 성씨가 체계화된 것은 고려시대였다. 태조 왕건은 개국 공신들과 지방 토호 세력들을 위해 전국 군현을 개편하면서 성을 하사하여 성씨 체계를 확립하였다.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은 흐릿하지만 지역주민 일부에게 같은 성을 부여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고려 문종 9년(1055)년에 성이 없는 사람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게 하는 법령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지배계층들이 성을 갖는 관행이 보편화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초기에 성씨를 가진 사람은 10~15%였다. 조선 중기가 되면 전체 인구의 40%가 족보를 만들거나 족보를 사고 팔아 성씨를 가지게 되었다. 1895년 갑오경장 때 신분제를 철폐하고 1900년 민적법(호적법)을 실시하면서 한국인은 100% 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돌쇠, 밤쇠, 개똥이, 소똥이, 삼월이 등등의 이름으로 살던 절대 다수의 한국인들은 이름으로나마 양반이 되고 싶었던 소망을 이루었다. 

다시 말해 얼마 전(?)까지 우리 나라 인구의 60%가 성씨가 없었고, 조선시대 초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나라 인구의 거의 90%가 성씨가 없었다. 현재는 모든 한국인들이 양반 성씨를 가지고 있다.
일본은 1870년까지 무사(武士) 아래 계급에는 성씨를 가질 수 없게 하다가, 메이지 시대인 1875년에 '성씨 의무령'에 따라 모든 국민들이 성씨를 가지게 되었다. 그 직후에 순식간에 8만개의 성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런 사정으로 일본인들은 중국이나 한국과 다르게 성씨에 대한 자부심이나 애착이 적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창씨를 한데 비하여, 한국인들은 기존에 있던 유명한 양반들의 성으로 호적을 만들어 자신들의 성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신분제 철폐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부리던 노비들을 계속 부리기 위하여 자신들의 성을 그들에게 부여하면서 특정 성씨의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고 한다. 반면에 안동 김씨였던 김좌진 장군은 부리던 노비들에게 토지를 나눠주고 자신의 성을 부여한 뒤 신분을 해방시켜주었다고 한다. 
성씨의 역사를 보면,  '안동 김씨라고 다 같은 안동 김씨가 아니다'라고 할 수도 있고, '성씨는 상당 부분 혈연과 관계없는 허구다'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디선가 김해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김수로왕의 피를 함께 나눈 후손으로 여겨져 친근감을 느끼는 것은 '관념의 작용'일 뿐일 수 있다.

오랜 기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동성동본 혼인 불가'라는 민법 조항이 굉장히 오랫동안 한국에서 위력을 발휘하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성이 달라도 본관이 같으므로 결혼을 할 수 없다고 하여 청춘남녀를 생이별하게 만들었다. '조선 시대 양안의 연구' 등등의 논문으로 일제시대에 이미 성씨의 허구성이 학문적으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법이 제정되어 시행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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