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리스어 번역문에서 보이는 문제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유래한 고유명사의 표기에 대하여

by 소포로스 2024. 3. 20.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유래한 고유명사의 표기에 대하여

 

1) 문제제기


한국어는 대표단수를 선호한다. 대표단수는 음성이나 글자의 형태를 일관되게 유지하여 대화 중이거나 글 속에서 그 의미전달을 쉽게 한다. 

그리스의 중심 도시였던 아테네(Αθήνα ‘아티나’ 현대 그리스어)를 고대 그리스어로는 아테나이(Ἀθῆναι)라고 불렀다. 한 명의 아테네 사람을 가리킬 때는 ‘아테나이오스(Ἀθηναῖος)’라고 부르고, 복수를 가리킬 때는 ‘아테나이오이(Ἀθηναῖοι)’라고 불렀다. 

그런데, 한국어로 표현할 때는 그리스의 중심 도시를 ‘아테네’라고 하고, 거기에 사는 한 명의 사람을 가리킬 때는 ‘아테테인’ 또는 ‘아테네 사람’이라고 한다. 심지어 한국어는 복수 개념이 희박하므로 여러 명을 가리키거나 전체를 가리킬 때도 단수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복수의 사람을 가리킬 때는 ‘아테나이오이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고 ‘아테네 사람들’이라고 한다. 한국어는 어형변화 대신에 대표 단수에 ‘~들’을 추가하여 복수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2) 고유명사의 한국어 표기


(1) 한국어로 표현된 부족명이나 민족명

한국어는 부족명이나 민족명을 표시할 때 지명+사람, 지명+인 또는 지명+족 등으로 하는 것을 가장 선호한다. 지역명을 대표 단수로 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한 사람의 아테네인이나 다수의 아테네인을 가리킬 때, 그들이 사용하는 단수형인 아테나이오스(Ἀθηναῖος)나 복수형인 아테나이오이(Ἀθηναῖοι)를 사용하지 않는다.  

사람의 이름이나 신의 이름을 표기할 때도 한국어는 대표단수를 사용한다. 따라서 부족명을 표기할 때, 거주지명이 확실하지 않으면 부족명의 단수를 사용하거나 복수를 단수화시켜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2)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부족명과 민족명

문제의 근원은 라틴어와 그리스어에서 표기하는 부족명이나 민족명이 한국어의 특성과 맞지 않는데서 유래한다. 

이들 언어에서 민족명과 부족명을 나타낼 때는 복수를 사용하고, 이를 사전의 독립적인 표제어로도 사용한다. 이에 따른 영향으로 영어에서도 부족명의 기본형을 복수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는 거의 모든 명사를 단수화시켜 받아들이고, 복수를 나타낼 때는 단수에 ‘~들’을 추가하는 한국어의 특성과 맞지 않다. 


3) 번역문에서 보이는 문제


(사례1)

모 출판사에서 나온 ‘아르고호의 모험’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무사이 여신들이여, 저에게 노래를 부르도록 영감을 주십시오!’

복수의 무사 여신을 ‘무사이 여신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각주에는 단수는 ‘무사 여신’이지만 복수는 ‘무사이 여신들’라는 설명까지 나온다. 이는 ‘1대의 트랙터’와 ‘10대의 트랙터스’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상하다. 

한국어는 대표단수(Μοῦσα, 무사)를 선호하고, 굳이 복수(Μοῦσαι, 무사이)를 표현하려면, 단수 명칭에 ‘~들’을 추가하므로, 위 문장은 다음과 같이 번역해야 한다. 

‘무사 여신들이여, 저에게 노래를 부르도록 영감을 주십시오!


(사례2)

대표적인 일리아스 번역서로 알려진 천병희와 이준석의 번역에도 첫 시작 부터 부족 명칭의 표기에 대한 문제가 보인다. 

글이 시작되는 2번째 행에서 천병희는 ‘아카이오이족에게’라고 번역하고 있고, 이준석은 ‘아카이아인들에게’라고 번역하고 있다. 

원문은 ‘아카이오이스(Ἀχαιοῖς)’인데, 아카이오스(Ἀχαιός)의 복수 여격이다. 복수 주격은 아카이오이(Ἀχαιοί)인데, 천병희 선생은 이를 그대로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단수 기본형인 아카이오스(Ἀχαιός, 단수)의 뜻은 ‘아카이아(Ἀχαΐα) 지방에 사는 사람’을 말한다. 

우리말의 특성에 비추어 볼 때, ‘지명+인’ 형태인 이준석 교수의 번역이 더 적합해 보인다.

만약 지명이 불확실하거나 잘 쓰이지 않는다면 대표단수를 취하여 ‘아카이오스인’, ‘아카이오스족’ 또는 ‘아카이오스 사람들’ 등으로 표기하는 것이 한국어의 특성에 더 부합한다. 한 사람은 ‘아카이오스 인’이라 부르고, 여러 명의 사람은 ‘아카이오이 인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국어답지 않다. 


(사례3)

한국어 ‘켈트인’은 그리스어나 라틴어가 아니라 영어 ‘Celt’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미 굳어진 용어이므로 ‘켈트인’이라고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글의 목적에 따라 당시의 명칭으로 부르고자 할 때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리스어 단수는 켈토스(Κελτός)이고 복수는 켈토이(Κελτοί)이며, 라틴어 단수는 켈타(Celta)이고 복수는 켈타이(Celtae)이다. 

한국어 특성에 맞는 한글표기는 켈토스인, 켈타인 등일 것이다. 만약 복수를 사용하는 관행을 받아들인다면 켈토이인, 켈타이인 등이 된다. 이에 대한 정리도 필요할 수 있다. 단수는 ‘켈타 사람’이라 부르고 복수는 ‘켈타이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사 여신’과 ‘무사이 여신들’의 경우 처럼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4) 맺는 말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부족명과 같은 고유명사에 대한 한국어 표기의 원칙을 정해야 한다.

널리 사용되는 지명인 이오니아, 도리아, 아이올리아, 갈리아, 아퀴타니아 등등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오니아인, 이오니아인들, 이오니아족, 도리아인, 도리아인들, 도리아족 등등으로 쉽게 표현할 수 있지만, 지명이나 부족 구성원 개개인을 나타내는 단수 명칭이 거의 사용되지 않는 경우에는 고유명사의 표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할 필요가 있다. 

단수형이 잘 쓰이지 않거나 문헌상 단수의 용례를 찾을 수 없는 경우와  단수형 자체가 불명확할 때는 어떻게 표기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해 보인다. 

기본적으로는 원어가 복수형일지라도 단수화시켜서 외래어를 받아들이는 한국어의 특성에 맞게 해결하면 될 것 같다. 외래어는 한국어이므로 어원이 되는 원어와 반드시 ‘수일치’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5) 연구자들에게 바라는 점


언중에 의해 한 번 굳어진 용어를 다시 회복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심지어는 거의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원전을 연구하거나 번역을 하는 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일차적으로, 부족명이나 민족명 그리고 원어에서 단수와 복수의 표현이 공존하고 있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단어(예, 무사 여신)에 대한 한글 표기 원칙을 정하고, 외래어 표기 사례들을 모아 인터넷 등에 공개하여 연구자나 학습자라면 누구나 검색을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하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한글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등에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어 한국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 기원 외래어 표기법이 정착되었으면 한다. 


2024-03-15

20230401_181132_HDR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