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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 번역문에서 보이는 문제

일리아스 1권 1-5행 번역 - 천병희와 이준석의 번역문 살피기

by 소포로스 2024. 2. 29.

 

일리아스 1권 1-5행에 대한 천병희와 이준석의 번역에서 보이는 문제

 

1) 번역문의 비교


(천병희 역)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아카이오이족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가져다주었으며
숱한 영웅들의 굳센 혼백들을 하데스에게 보내고
그들 자신은 개들과 온갖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한
그 잔혹한 분노를!” 

(이준석 역)
노여움을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노여움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아카이아인들에게 안겨주었고,
그 많은 영웅들의 강인한 목숨을 하데스로 떠나보냈으며,
그들 자신을 온갖 개떼와 새 떼의 먹이로 만든
그 저주받을 것을!

(출처 : 한겨레 신문 2023-06-30)


(필자의 직역)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시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파멸적인 분노를! 그것은 아카이아인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었고,
수많은 영웅들의 용감한 영혼들을 하데스에게 
보내버렸다. 그리고 그들을 모든 개들과 새들의 
밥이 되게 하였다. 이렇게 제우스신의 계획은 수행되고 있었다.

(원문)
μῆνιν ἄειδε θεὰ Πηληϊάδεω Ἀχιλῆος
οὐλομένην, ἣ μυρί' Ἀχαιοῖς ἄλγε' ἔθηκε,
πολλὰς δ' ἰφθίμους ψυχὰς Ἄϊδι προΐαψεν
ἡρώων, αὐτοὺς δὲ ἑλώρια τεῦχε κύνεσσιν
οἰωνοῖσί τε πᾶσι, Διὸς δ' ἐτελείετο βουλή,   5


2) 번역문에서 보이는 문제


(1) αὐτοὺς의 번역 -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르키는가?


그리스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은 하데스에게 가고, 육체는 지상에 남는다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이 부분은 그리스인들의 죽음에 대한 관념이 반영된 내용이다. 

천병희역과 이준석역은 αὐτοὺς를 ‘그들 자신’으로 번역하므로써, 죽은 병사들의 영혼은 하데스에게 가고, 남은 육체는 짐승들의 먹이가 되는 상황을 덜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αὐτοὺς는 ‘영혼을 떠나보낸 그들’을 가르키는 것으로 보인다. 문장의 구조를 보면, ἣ이하의 관계사절에서 주어 ἣ는 μῆνις(분노)를 대신하고 있으며, ἔθηκε(주었다), προΐαψεν(던졌다), τεῦχε(만들어 주었다) 등 3개의 동사의 주어 역할을 한다. 

따라서 αὐτοὺς(남성 대격 단수)는 τεῦχε의 목적어로 쓰인 3인칭 대명사 대격이지, 주어와 같은 것을 가리키는 재귀대명사가 아니다. 주어는 ‘그들’이 아니라 ‘그것’ 즉 아킬레우스의 μῆνις(분노, 여성 단수)이다. 

이준석 역의 ‘목숨을 하데스로 떠나보냈다’도 낯선 문장이다. 목숨이 아니라 혼백이나 영혼 등등을 하데스에게 보냈다고 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2) κύνεσσιν οἰωνοῖσί τε πᾶσι - 모든 개들과 새들

천병희 역은 ‘개들과 온갖 새들의’이고, 이준석 역은 ‘온갖 개떼와 새 떼의’이다. ‘온갖 개떼와 새 떼의’가 더 정확한 번역이다.

유사한 어구로 일리아스 1권 66행의 ἀρνῶν κνίσης αἰγῶν τε τελείων는 '흠없는 양들과 염소들의 향(κνίσης)'이다. 영문 번역 중에 ‘양들과 흠없는 염소(lambs and unblemished goats)’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부정확한 번역이다. 염소는 흠이 없어야 하고, 양은 흠이 있어도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ἀρνῶν κνίσης αἰγῶν (κνίσής) τε τελείων으로 볼 수 있다.

‘모든 개들과 새들’이라는 표현은 호메로스의 시적 과장이다. 호메로스 시에는 ‘헤아릴 수 없는 몸값’ 등등 시적 과장이 종종 등장한다. '모든'과 '온갖'은 약간의 어감상의 차이가 있다. 온갖은 ‘이런저런 여러 가지’를 뜻하는 말로 실제적으로 가능한 일을 표현한 말이고, ‘모든’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한 과장된 표현이다.

참고로, 어떤 판본에서는 πᾶσι(모든)가 δαῖτα(잔치)로 나온다. ἑλώρια τεῦχε κύνεσσιν οἰωνοῖσί τε δαῖτα(여성 대격 단수)라면, ‘개들에게는 먹이를  만들어 주고 새들에게는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정도의 의미가 될 것이다.


(3) μῆνιν οὐλομένην - 그 저주받을 것? 

이준석 역의 ‘그 저주받을 것’은 μῆνιν οὐλομένην을 번역한 것이다. 천병희 역에서는 ‘잔혹한 분노’라고 나온다. 이 글의 주인공인 ‘아킬레우스의 파멸적인 분노’를 말한 것이다. οὐλομένην은 ὄλλῡμι(파괴하다, 죽이다, 끝내다)에서 온 분사이다. 직역하면 ‘죽음을 몰고 오는 또는 파멸적인 분노’이다. 

독자들은 번역어에 따라 다른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의역보다는 직역이 더 나았을 것 같다. 필자는 처음에는 분노의 내용이 궁금했지만 점차 글을 읽어가면서 참 ‘쪼잔한 분노’로 느꼈다. 그러나 당시의 그리스인들은, 신과 같은 아킬레우스의 분노에 대하여 ‘무시무시한 경외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 저주받을 것’이라는 용어가 잠시 낯설게 느껴졌다. 차라리 ‘그 저주의 분노’라고 표현하면 더 나았을 것 같다.

참고로 메닌과 콜로스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μῆνις, μήνιος, ἡ : 깊게 쌓인 분노(명사 3변화)
χόλος, χόλου, ὁ : 순간 폭발하는 분노, 쓸개즙(명사 2변화)


3) 덧붙이는 말


천병희 선생은 우리들에게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한글로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현재로서는 이 만큼 생생하고 정확하며 읽기 쉬운 번역도 드물 것이다. 사소한 표현상의 문제는 문맥을 통해 오해없이 전달될 수 있다. 이런 사소한 논의는 선생도 반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소한 논의는 선생도 반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준석의 번역도 기회가 되면 한 번 읽어보고 싶다.


4) 영어번역문 살펴보기


앞 부분을 다 쓰고 나서 문득 일리아스 영어번역문을 몇 개 살펴보았다. 임의로 선정해 살펴 본 영어 번역문들의 이 부분에 대한 특징은 아래와 같다. 


ⓐ αὐτοὺς의 번역을 머레이는 themselves라고 모호하게 처리하였고, 포프는 limbs(팔다리)로 의역하였고, 래티모어와 페이글스는 bodies(육체)로 번역하고 있다. 래티모어와 페이글스가 원문의 의도에 가장 근접한 번역을 하고 있다. 

ⓑ κύνεσσιν οἰωνοῖσί τε πᾶσι를 머레이, 래티모어는 '개들과 모든 새들'로 번역하고 있다. 반면에 포프와 페이글스는 '개들과 새들'로 번역하여, 호메로스의 시적 과장(모든 개들과 모든 새들')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 μῆνιν οὐλομένην을 머레이는 baneful wrath(사악한 분노), 포프는 wrath, 래티모어는 the anger and its devastation(분노와 대규모의 황폐화), 페이글스는 the rage murderous, doomed라고 표현하고 있다. 영어에 대한 감이 없으므로 평할 수 없다. 



(1) 머레이(A. T. Murray)

The wrath do thou sing, O goddess, of Peleus’ son, 
Achilles, that baneful wrath which brought countless 
woes upon the Achaeans, and sent forth to Hades 
many valiant souls of warriors, and made themselves 
to be a spoil for dogs and all manner of birds
(출처 : A. T. Murray, Homer The Iliad, Leob Classic No. 170, Harvard University Press, 1928, 3쪽)

☞ ‘개들과 온갖 종류의 새들’로 번역하고 있다. themselves는 원문에 충실하려는 의도로 보이지만, 문장의 주어가 wrath를 대신한 관계대명사 which인데 목적어가 themselves인 문장이 자연스러운지는 평가하기 어렵다. 



(2) 포프(Alexander Pope)

Achilles' wrath, to Greece the direful spring
Of woes unnumber'd, heavenly goddess, sing!
That wrath which hurl'd to Pluto's gloomy reign
The souls of mighty chiefs untimely slain;
Whose limbs unburied on the naked shore
Devouring dogs and hungry vultures tore. 
(출처 : Alexander Pope, The Iliad of Homer, 1915, 1-2쪽) 

☞ 창작에 가까운 의역이다. '모든 개들과 새들'이라는 호메로스의 시적 과장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 너무 많이 사망하여 미처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개들과 새들의 먹이가 된 것은 팔다리(limbs)만이 아니라 팔다리를 포함한 몸뚱아리 전체이다. 



(3) 래티모어(Richmond Lattimore)

Sing, goddess, the anger of Peleus’ son Achilleus

and its devastation, which put pains thousandfold upon the
Achaians,
hurled in their multitudes to the house of Hades strong souls
of heroes, but gave their bodies to be the delicate feasting
of dogs, of all birds, and the will of Zeus was accomplished 

☞ '개들과 모든 새들'로 번역하고 있다.


(4) 페이글스(Robert Fagles)

Rage—Goddess, sing the rage of Peleus’ son Achilles,
murderous, doomed, that cost the Achaeans countless losses,
hurling down to the House of Death so many sturdy souls,
great fighters’ souls, but made their bodies carrion,
feasts for the dogs and birds
(출처 : Robert Fagles, The Iliad, Penguin, 1990, 77쪽)

☞ '모든'을 빼고 단순히 '개들과 새들'로 번역하여, 호메로스의 과장법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관련글 : 일리아스 1권 01행-05행의 그리스어 원문과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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